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파엘로 산치오 (문단 편집) == 여담 == * 자화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상당한 미남으로 당시 여성들의 인기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유약하고 모성애를 자극하는 외모와는 별개로 그는 여색을 매우 밝혔다고 하는데 오죽하면 동시대 화가이자 미술사가인 조르조 바사리는 자신의 저서 <미술사 열전>에서 연애의 열병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게 아닐까라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다만 정설은 찬 날씨에 연인과의 만남을 위한 잦은 외출로 인한 폐렴이며 의료사고의 가능성도 있다는 논문도 발표되었던 바가 있다. 판테온에서 발굴된 두개골로 3D 복원을 시행하여 공개되기도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00807001804349|하였다.]] * 동 시대의 판화가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가 남긴 라파엘로의 모습이 동판화로 남아있다. 1512년 작품으로 파리의 프랑스 국립 도서관 및 LA 미술관, 볼로냐 미술관 등 여러 곳에 전시되어 있다. 라파엘로는 [[뒤러]]가 판화 만드는 방법을 알고 싶어 라이몬디에게 연구해보도록 권유하여 성공한다. 라이몬디는 라파엘로의 여러 그림을 판화로 남기고 대중화에 성공하게 된다. [[파일:Raimondi Portrait_of_Raphael,_Seated_LACMA_M.88.32.jpg|width=30%]] * 동시대인인 북유럽 르네상스의 거장 [[뒤러]]와 접점이 있다. 뒤러가 12세 연상이며 서로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당발이자 자신의 프로모션에 열심히 노력한 뒤러는 유명한 예술가들을 많이 만나고 싶어하고 그들의 작품도 소장하기 원했다. 뒤러는 1505년에 안드레냐 만테냐와 조반니 벨리니 등 베네치아의 유명한 화가들들 만나기 위해 노력하였고 실제로 벨리니를 만나기도 했다. 뒤러는 라파엘로에게도 자신의 자화상[* 어떤 그림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바사리도 이들의 일화를 언급한다. '뒤러는 그에게 경의를 표하여 자기 자화상을 증정했다. 이 그림은 투명한 흰 삼베에 그린 수채화로, 흰 페인트를 사용하지 않아도 그 자체가 빛 역할을 한다. 라파엘로는 이 훌륭한 작품을 받은 보답으로 자기 그림 몇 점을 뒤러에게 보내기도 했다. 뒤러는 그것을 퍽 소중히 여겼다. 뒤러의 초상화는 라파엘로의 유산 상속인 줄리오 로마노 소유가 되었다.'][* 로마노가 받은 이 그림에 대해 바사리는 '줄리오 로마노' 전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로마노 집에는 보물이 많았는데, 특히 흰 삼베에 그린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은 뒤러가 라파엘로에게 보내온 것으로, 정성 들여 수채화로 그리면서 백연은 쓰지 않았으며, 직물 자체가 흰색 바탕 역할을 하고 섬세한 실가닥이 턱수염의 털로 보이도록 했으며, 빛에 반사해보면 투명하게 보인다. 로마노는 이 작품을 높이 평가했으며 내가 용무로 만토바에 들렀을 때 기적이라면서 보여준 적이 있다.']을 보낸바 있으며 라파엘로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1515년에 2명의 남자를 적분필로 그린 드로잉을 선물로 보낸다. 뒤러는 라파엘로에게 받았다는 메모를 같이 남겨두었다.[* '1515 Raphael of Urbino, who is so highly regarded by the Pope, asserts that he has made this nude drawing and sent it to Albrecht Duerer at Nuernberg (in order) to show/demonstrate to him his hand' -> '1515년에 교황에게 높은 대우를 받는 우르비노의 라파엘로가 재능을 보여주는 이 누드 드로잉을 그려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에게 보냈다.'] 라파엘로의 방에 있는 '오스티아의 전투'의 준비를 위한 드로잉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라파엘로가 왜 완성본을 보내지 않고 드로잉을 보냈냐면 드로잉이 인체의 구성을 더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https://e-arthistory5.blogspot.com/2017/10/raphael-and-durer.html|링크]] 참조. [[파일:red chalk Raphael.jpg|width=30%]][* [[빈]] 알베르티나 미술관 소장.] * 천재의 상징으로 '신적 예술가(divino artista)'라 불리며 후대의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그래서 당시 유행했던 [[골상학]]자들의 표적이 되었고, 그의 두개골은 1675년 [[판테온]]에서 라파엘로의 흉상이 설치될 때 나무 성물함에 담겨 산 루카 아카데미로 옮겨진다. 1788년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을 할 때 순례 여행 일정 중 하나로 산 루카 아카데미에 들러 라파엘로의 두개골을 보고 존경심을 바쳤다. 한발 더 나아간 괴테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석고 모형과 거푸집을 통해 모형 복제품을 만들어 유명 골상학자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젊은 예술가들은 라파엘로 두개골에 연필을 대는 숭배 의식을 통해 그의 재능을 얻고자 했다. 성 누가는 구름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를 보고 그림으로 그려 예술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졌는데, 괴테 시대의 낭만주의자들은 라파엘로가 성 누가의 자리를 대체한 것으로까지 여겼다.[* 참고: 신승철, 아름다운 껍데기: 라파엘로의 두개골과 예술가 숭배, 2021] * 라파엘로가 1505년에 남긴 [[모나리자]]의 스케치가 전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 [[루브르]]에 있는 모나리자와 다른 모습이기 때문에 '2개의 모나리자'가 존재한다는 이론이 있다. 그 근거는 라파엘로가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레오나르도]]의 스튜디오를 방문해서 모나리자를 보고 남긴(본 자리에서 그렸는지 추후에 기억의 의존해서 그렸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스케치이며 현재의 모나리자와 달리 인물 뒤에 기둥들이 위치하고 있다. 이전에는 현재의 모나리자는 추후에 레오나르도가 변형을 가한 것이라고 생각되었으나 1993년 연구 결과 그런 것은 없다고 확인 되었으며 이후의 연구들도 모두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라파엘로는 다른 모나리자를 본 것이라는 이론이 떠오른다. 많은 연구자들은 라파엘로의 스케치가 레오나르도의 자화상을 기반으로 했을 것이라고 동의한다. 아마도 그림의 모델인 리사 델 조콘도의 남편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가 1503년 10월에 주문해서 착수한 첫번째 모나리자가 라파엘로가 본 그림일 가능성이 높으며[* 현재 소재 미상], 1513년에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주문한 그림이 아마 현재의 모나리자일 가능성이 높다. 레오나르도가 현재의 모나리자 그림에 1513년에 착수하여 1516년 프랑스 궁에 초청 받아 떠나며 가지고 갔고 1516년이나 1517년까지 수정을 계속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1517년에 오른손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미완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전시되어 있는 루브르에서는 1503-1506년에 그려졌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동의하지 않는 사학자들도 많다. 라파엘로는 이 스케치 뒤의 기둥을 자신의 그림 '유니콘과 함께 있는 여인의 초상'에 활용하였고, 현재의 모나리자와 유사한 구도로 '마달레나 스트로치 도니의 초상'을 그렸다. 라파엘로의 이 스케치도 루브르에서 소장하고 있다.[[https://collections.louvre.fr/ark:/53355/cl020101111|링크]] [[파일:AGO101111-000_PE.jpg|width=30%]] * 죽을때까지 [[독신]]이었지만 정부(情婦)가 있었는데, 마르게리타 루티라는 여인으로, 라파엘로보다 10~17살이나 연하였으며[* 마르게리타 생년이 정확하게 전하지 않아 차이가 있지만 1493~1500년경에 출생한 것이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라 포르나리나'(제빵사네 딸)라는 별칭을 가진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라 발레타가 1516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에 1516년부터 관계가 시작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또한 많은 작품의 [[성모 마리아]] 모델은 마르게리타라고 추정되고 있다.[* '시스티나 성모', '의자의 성모' 등] 이렇게 사랑하면서도 당시 세간의 비난을 받으면서 동거 관계만을 유지한 데는 이유가 있는데, 라파엘로가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비비에나 [[추기경]][* Cardinal Bibbiena, 본명은 베르나르도 도비치(Bernardo Dovizi, 1470 - 1520)이며 본디 극작가, 학자, 외교관으로 1513년에 추기경으로 지명되었다. 레오 10세의 친구이자 신용하는 개인 비서로 활약하였다. 여담으로 라파엘로가 사망한 해이자, 사망하고 7개월 후인 1520년 11월 9일에 비비에나 추기경 역시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라파엘로가 남긴 그의 초상도 우피치에 소장되어 있다.]의 조카인 마리아 비비에나와 1514년 에 약혼하였기 때문이다. 마리아 비비에나는 라파엘로가 사망한 1520년에 같이 죽었다.[* 라파엘로의 사망 후로 추정된다. 비비에나 추기경이 조카딸에게 라파엘로의 마지막 순간을 알리는 편지를 보낸 것이 전한다. 아마 마리아일 것이다.] 라파엘로는 후원자 아고스티노 키지의 도움으로 마르게리타와 비밀 장소에서 만났다고 전해진다. 결혼 상대가 추기경의 조카인데다 추기경 역시 라파엘로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형이라 차마 파혼하고 훨씬 미천한 빵집 딸과 결혼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낼 수도 없었기에 약혼을 해놓고도 결혼을 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미혼으로 버틴 것이다. 하지만 마르게리타를 만난 것이 약혼하고도 2년 후였던 것을 감안하면 그냥 결혼에 뜻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마르게리타를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되는 작품은 '[[https://en.wikipedia.org/wiki/La_Fornarina|라 포르나리나]]'인데, 그녀의 왼손에는 약혼반지가 끼어져 있으며 팔에는 'RAPHAEL URBINAS(우르비노의 라파엘로)'라는 글씨가 새겨진 리본을 하고 있다. 그런데 라파엘로 사후에 제자들이 스승의 명예를 위해 반지를 덧칠로 지워 버리는 바람에 이 사실은 500년이 지난 2001년에서야 복원 과정에서 [[:파일:La_Fornarina_by_Raffaello.jpg|밝혀지게 된다.]] 그리고 라 포르나리나보다 3년 먼저 그려진 [[:파일:la-velata.jpg|라 벨라타]]도 라 포르나리나의 모델과 외모가 같아서 동일인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마르게리타 루티는 라파엘로 사후 수도원으로 갔다고 하며 이후의 일생은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지만 수도원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생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라 포르나리나'의 얼굴은 제자인 줄리오 로마노가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 비비에나 추기경이 조카딸[* 아마도 라파엘로의 약혼녀 마리아 비비에나로 추정된다.]에게 쓴 편지에 라파엘로의 마지막 순간이 기록되어 있다. 혼수 상태에서 잠시 의식을 회복한 그는 주위에서 친구들이 그에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는 "해는 언제 뜨지? (Whence comes the sunshine?)"라고 말하고 "행복해...(Happy.....)"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 [[라파엘 전파]]라는 후대의 화파의 라파엘이 바로 라파엘로이다. * [[피카소]]가 어릴 때부터 라파엘로만큼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 드립의 희생양이 되었다. 정확한 말은 다음과 같다. 다만 이건 말 그대로 드립일 뿐이고 피카소는 사실 라파엘로를 극찬한다. 피카소는 교황과 라파엘로, 라 포르나리나(마르게리타 루티)를 그린 에칭을 수십 점 남기기도 했다.[[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369974|링크]] > '라파엘로처럼 그리는데는 4년이 걸렸지만, 아이처럼 그리는데는 평생이 걸린다.' > 'It took me four years to paint like Raphael, but a lifetime to paint like a child.' > '레오나르도는 우리에게 천국을 약속했고, 라파엘로는 천국을 주었다.' > 'Leonardo da Vinci promises us heaven. Raphael gives it to us.' * 유로화 이전 [[이탈리아 리라|이탈리아 50만 리라]] 지폐의 주인공이다. 앞면에는 '갈라테아의 승리', 뒷면에는 '아테네 학당'의 일부가 그려져 있다. [[파일:Lire_500000_(Raffaello_Sanzio).jpg|width=4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